대한민국 근로시장의 현재 모습은 '일하는 노인, 노는 청년'이라는 한 구절로 설명할 수 있다. 노인과 청년은 모두 '거꾸로 된 세상'에서 생존을 위해 각자만의 전투를 벌이고 있다.
노인들은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집을 나서고, 청년들은 한 푼이라도 더 높은 임금을 주는 회사에 가기 위해 '존버(끈질기게 버틴다는 의미의 은어)'한다.
역대 모든 정부의 일자리 정책의 기조도 이런 현상에 동의라도 하듯이, 청년 취·창업을 독려하고자 현금성 지원에 아낌이 없었고, 중장년층들의 재취업 여건을 마련하고자 공공과 민간분야에서 저임금의 노인 일자리와 시니어 일자리를 창출하기에 급급했다.
과거 정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책들의 효과가 미미했는지, 아니면 사회적 현상의 흐름이 너무나도 강해 그 흐름을 역행할 수 없었던 것인지는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일하는 노인과 노는 청년' 현상은 더 극심해졌다.
지금의 사회는 얼마나 붕괴됐는지, 얼마나 심각하게 붕괴되고 있는지 작금의 현실을 다시 직시해 볼 필요가 있다.
사회 붕괴 수준을 논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자살률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1897년 그의 저서 '자살론'을 통해 자살은 개인적 요인이 아닌 사회적·구조적 영향에 의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당시 서구사회는 가톨릭, 청교도인들로 구성돼 있었고, 그들의 신앙적 가치관에서 자살은 '종교적 타락'이자 '개인 차원의 문제'정도였다.
뒤르켐이 제시한 자살의 사회구조적 관점은 서구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자살은 사회적 구조에 의해 떠밀려하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인식이 심어지게 된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이후 시대의 후속 연구들을 통해 자살은 '자신을 스스로 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가 사람을 살해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게 됐다.
보수적인 일부 종교사회에서도 사회구조적 관점의 맥락을 수용했다. 자살자에 대해 신앙심이 약했던 것이라고 비난하기보다 사회에 의한 살인으로 보는 온건한 관점을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근현대사회에서도 이런 맥락을 수용했고 자살은 국가적 재난이자, 사회적 재앙의 수준을 나타내는 결과 지표로써 여겨지게 됐다.
사회가 살해한 세대는 청년일까 노인일까.
통계청이 조사한 '2022년 성별&연령대별 자살현황'에 따르면, 청년들은 '인구 10만 명 당' 20대는 21.4명, 30대는 25.3명, 40대는 28.9명이 자살을 선택했고, 노인들은 70대에서 37.8명, 80대 이상 세대에서 60.6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대와 80대 이상의 자살률은 약 3배(△39.2명) 가량의 차이가 날 정도로 노인 자살은 심각한 수치를 보였다. 2022년 이전의 통계자료와 비교해 보면 그나마 줄어든 수치가 이 정도라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많은 연구자들은 노인들이 자살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노인 빈곤 문제가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20년 대한민국은 OECD 회원국 중 노인 빈곤율 1위를 기록했다. 1945년 해방둥이로 태어난, 혹은 더 일찍이 태어난 80대 이상의 노인들은 일제강점기를 겪고, 6·25 전쟁까지 생사를 넘나 드는 역사 속에서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빈곤으로 인한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다는 뜻이다.
"밥은 먹었나?", "집에 쌀은 있나?" 1937년생에 태어난 필자의 외조부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인사 대신 물었던 말이다. 상대의 식사를 묻는 것이 안녕을 묻는 것이라 여기고 살아온 80대 이상 세대에서 보이는 '높은 자살률'은 그런 의미에서 아픔과 슬픔이 교차한다.
태어나서부터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날까지 삶의 순간, 순간에서는 '배고픔'이 총과 칼을 들이밀며 목숨을 위협했던 일본 순사나 북한 괴뢰군보다도 더 큰 적이었던 셈이다. 이것이 '미래를 짊어질' 청년 문제에 가려져 있던, '과거를 짊어진' 노인 문제의 민낯이다.
이제 막 노인의 문턱을 넘어서는 60년대생 신흥 노인들은 나름 배고프지 않을 노후를 위해 일찍이 준비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경제·사회 격동기를 맨몸으로 이겨낸 역동의 일꾼답게 가난하지 않을 노후를 위해 발버둥 쳐왔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고성장시기 끝자락에서 맞이한 1997년 외환위기(IMF)의 타격은 거셌다. 기업들의 팔, 다리를 잘라내는 구조조정으로 인해 60년대생들은 회사에서 쫓겨났고, 생계를 위해 자영업에 뛰어들었다. 인생의 고점과 저점을 수 차례 오갔던 순간들 중 그저 한 번일 뿐이었다. 이 단일 사건 하나만으로도 60년대생의 자영업자 비율이 약 40%에 육박하게 된 원인을 설명하기에 충분할 정도다.
그럼에도 60년대 중년층들은 자녀세대들의 비상을 위해 스스로의 노후를 나름의 방법으로 준비해 왔다. 건국 이래 전 국민, 전 세대가 처음 겪어 보는 대규모 금융자본의 침략 전쟁에서 '머니게임'의 원리를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 하나 없었음에도 말이다. 전 국민 모두가 '검은 머리 외국인'의 투자공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정도였다. 그저 맨몸으로 노후를 준비했고, 투자가 아닌 투기의 등락 파동에 몸을 던지는 불나방이자 동학개미였다.
김경록 작가는 '60년대생이 온다(2024)'에서 60년대생을 '부모를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녀에게서 부양받지 못하는 첫 세대'라고 표현했다.
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부담과 자녀를 키워내야 하는 '이중부양부담'을 청년 세대보다 먼저 겪어왔던 60년대생들은 '이중부양부담'의 사슬을 끊어내는 것이 경제발전기를 겪으며 이해한 '양극화 사회'에서 자신들의 자녀가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중부양부담'을 자신의 세대에서 끊어내려는 노력은 80-90년대에 태어난 청년 세대에서도 이미 시작됐다. 장년, 중년 세대들을 지켜봐 온 청년 세대들은 더 똑똑해졌다. 부모 세대, 중년 세대들의 '황혼 독립 전쟁'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부모 세대인 중년층들은 노후를 대비하며 자녀들에게 짐이 되지 않는 것이 가장 바라는 것이라 말해왔고, 자녀 세대들은 그 소망을 꽤 빈번히 들어왔다. 소박한 소망처럼 들릴지라도 이 소박한 소망이 간절하다는 것은 반대로, 그만큼 소박하지 않다는 간접 반증이기도 하다.
3세대에 거쳐 이뤄진 '이중부양부담' 사슬 끊어내기는 인구 종말을 막아내고자 노력하는 인류의 마지막 도전일지도 모른다.
인류의 마지막 도전이라는 표현이 거창하게 들릴지 몰라도, 늑대들의 세계에서는 이미 생존법칙으로 만연한 현상이다. 늙은 늑대는 자식들의 부양 부담을 덜어주고자 무리를 이탈해 홀로 고독한 죽음을 맞이하고, 중년 늑대는 가장 앞에 서서 무리를 이끌고, 젊은 늑대는 만약을 위해 체력을 비축하며 전투를 준비한다.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의 생존법칙은 이런 늑대의 영역에 발을 들였다. '이중부양부담'의 사슬을 끊어내고자 노인들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있고, 중년들은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일자리로 떠나며, 청년들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더 위험한 배팅 포인트를 기다리고 있다.
필자는 이런 논의에 끝에서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봐야만 했다. 지금, 정말로 시급한 문제는 청년인가, 노인인가. 적어도 스스로 자처해 사회의 책임을 지고자 하는 자이라면, 세대 간 일어나는 '이중부양부담 사슬 끊기'에서 가짜 승리를 외치는 위정자, 비겁한 늑대가 되지 않기를 약속해야 하기 때문이다.